9. 농촌에 오려면 가슴의 소리에 들어라.
가짜 결혼을 하고 일부러 강아지를 분양받아 키우고 남이 농사를 지어놓은 것을 수확해서 세끼 밥을 해먹는다. 최근 몇 년 사이에 TV에서 인기를 끌던 프로그램의 내용이다. 처음에는 이런 방송을 왜 만드는지, 왜 인기가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이 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내가 직접 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 터인데, 스스로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문화전문가의 컬럼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일상이 판타지인 시대가 되었다 !’ 일상적이던 일들이 이제 하지 못하는, 할 수 없는 환상이 되어 잘 생긴 연예인들이 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라 했다. 수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N포 세대에게 세끼 밥을 직접 해서 먹는 것은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 할 수 없는 환상이 되었다는 씁쓸한 내용이었다.
왜 청년들은 일상을 포기한 것일까. 다니엘 튜더는 2002년 한일월드컵이 벌어지던 때에 대학생으로 한국에 있었다. 한국에 매료된 그는 이코노미스트의 기자가 되어 2010년 한국특파원으로 다시 왔다. 하지만 기자의 눈으로 본 한국은 월드컵에서 질서정연하게 열광하던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그는 한국은 전 세계에서 경쟁이 가장 심한 나라라고 꼬집고 있다. 그나마 경쟁이 공정하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이미 운동장은 기울어져 있고 기울어진 운동장의 아래에서 출발한 사람은 중간에서 출발한 사람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그래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좋은 대학에 갈 수 없고 좋은 대학에 갔다 해도 좋은 직장에 갈 수 없고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 해서 평생 일할 수 없고 평생 일한다 해도 행복해지지 않는 사다리가 걷어 차여진 그런 사회가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경제적이라는 말을 ‘화폐적’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려고 노력한다. 경제적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용어로 쓰지만 실제로는 들어간 돈보다 산출되는 돈이 더 많은 경우에 적용하는 말이다. 그래서 화폐로 계산되지 않는 비용과 이익은 고려되지 않는다. 단순히 더 많은 화폐가 생겼을 때 쓰는 용어이다. 더 나아가 나는 경제성장을 화폐적 발전이라 고쳐서 부른다. 경제성장은 경쟁력이 있는 산업으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필요한 것을 사기 위해 돈을 쓰면서 화폐 흐름의 규모를 늘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경쟁력 있으니 스마트 폰을 수출하여 돈을 벌고 경쟁력이 없는 농산물은 수입하면 되는 방식이다. 이제 이러한 화폐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예전과 같은 경제성장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인구성장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선진국의 과거 300년 동안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1.6%였고 이 절반은 인구증가 덕분이었다면서 앞으로 3~4%의 경제성장을 기대한다는 것은 환상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메이지유신 이후 150년간의 일본의 경제성장은 인구성장과 그 추세를 같이 하고 있고 2000년 이후 우리의 경제성장률 감소는 생산가능인구의 감소와 연동되어 있다. 두 번째 이유는 기업을 만들고 지원한다고 해서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교우위의 산업을 육성하여 기업을 만들어도 그 기업은 돈을 벌지 모르나 그만큼의 일자리는 생겨나지 않는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프레드릭 로르동은 일자리는 기업이 만드는 것이 아니며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결국 기업의 수주상황이고 기업의 수주상황을 결정짓는 것은 경기, 즉 돈의 흐름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세 번째 이유는 무한정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이라 가정했던 경제활동을 뒷받침하는 자원들의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저명한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앞으로 식량(Food), 에너지(Energy), 그리고 물(Water)이 부족해질 자원인데 흥미롭게도 이 세 개의 영어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모으면 ‘FEW(거의 없다)’가 되어 FEW가 few한 시대가 될 것이라 했다. 자원의 한계에 따른 비용의 증가는 경제성장의 뒷다리를 잡을 것이다.
국가의 경제성장, 즉 화폐적 발전은 산업단지와 도시를 개발하면서 지역의 인적, 물적 자원을 이동시켰다. 토지가 필요하니 부모들은 토지를 팔아 자식을 교육시켰고 전문지식과 기술을 가진 노동자가 되어 경제성장에 기여했다. 그렇게 경제는 성장했고 일자리가 만들어져 가난에서 벗어났다. 이 기제가 작동하는 동안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 노동을 통해 화폐를 벌 수 있었다. 그렇게 화폐적 발전모델과 화폐적 직업모델은 맞물리면서 돌아갔다. 하지만 이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균열과 미래에 닥쳐올 붕괴를 감지한 청년들이 대안을 찾아 농촌으로 들어오고 있다.
청년들이 완주에도 찾아왔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는 것을 포기했지만 자신의 예감을 확신하지 못해 불안하였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라는 생각에 다른 사람의 눈길을 피할 만큼 자존감이 낮았다.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었다. 농사는 수천 년을 지속한 것이고 누구든 먹고살아야 하니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농사와 관련된 일을 찾아내면 45살부터 잘릴 걱정 없이 평생 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느 날 인터넷 동영상을 보니 인공지능과 로봇이 농사를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이제 농부도 없어지겠구나. 눈앞이 깜깜했다. 농촌을 찾아오는 청년들에게 이제 무어라고 해야 할지, 나는 나이가 더 들면 무엇을 해야 할지 한동안 우울과 혼란에 빠졌다. 인공지능 자동차가 곧 상용화한다니 SF영화 같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인공지능 자동차가 운전기사만 없애는 것이 아니란다. 사고가 없는 그 자동차는 자동차 공업사도 없애고 보험사도 없앨 것이란다. 자동차를 공유하니 많이 만들지 않아도 되고 사고가 없어 튼튼하게 만들 이유도 없고 폐차할 일도 없으니 자동차 공장도 문을 닫아야 한단다.
그 시대에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살까. 그런저런 생각과 불안의 아노미의 터널에서 오랜 친구이자 동지, 김성원을 만났다. 자신의 집짓기 강좌를 수강한 사람 중에 집을 지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를 나에게 물어봤다. 단 2%란다. 가장 황당한 경우는 집을 지을 계획도, 집을 지을 돈도 없는데 그걸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 김성원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며칠을 고심하다가 어느 날 깨달았다고 한다. ‘건축본능 !’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무언가를 짓고 만들었던 경험이 유전자 속에 축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일을 할 때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오호라.
맞다! 우리에게는 본능이 있다. 경작본능, 매연이 심한 자투리땅에, 오고 가는 기름값이 더 비싼 주말농장의 텃밭에 고춧대를 심는 이유가 있었다. 목축본능, 그 좁은 아파트에 대소변과 날리는 털에도 강아지를 키우는 이유가 있었다. 요리본능, 공작본능, 노래하는 본능, 춤추는 본능, 본능으로 하는 일은 아마도 인공지능과 로봇이 대체하지 못할 것이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많은 일을 하는 세상이 되면 오히려 본능이 만들어 낸 것은 구별되고 더 존중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앞으로 많은 직업이 없어지겠지만 우리의 소중한 삶은 계속될 것이다.
잠시 눈을 돌려 아이들은 보자. 앞으로 세상은 빠르게 바뀐다고 하는데 20년 전과 같은 학교에서, 20년 전과 다르지 않은 선생님이, 20년 전과 같은 방식으로, 20년 후에 살아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더 불행하게도 그 꽃다운 나이에 집과 학교, 학원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돌고 있다. 이유는 오직 한가지이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 좋은 대학에 간다고 그 이후에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리 없다. 세상은 빠르게 바뀔 거라 대학에 간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아이들만 쳇바퀴를 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학원에 보내기 위해, 대학생을 만들기 위해, 결혼하면 전셋집이라도 얻어주기 위해, 최소한 운동장의 맨 끝에서 출발시키지 않으려고 부모들은 애를 쓴다. 두 세대가 같이 쳇바퀴를 돌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다. 돌고 돌아간 쳇바퀴가 만들어낸 것이 무엇인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이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것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열차에서 차마 뛰어내리지 못한다.
귀농귀촌과 관련된 강의를 가면 다른 어떤 일보다 농사일이 즐거워 온종일 할 수 있고 농사를 짓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 있느냐 물어본다. 아주 간혹 손을 드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고개를 젓는다. 본능이 돈을 버는 노동이 되면 고되고 지겨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많은 돈을 벌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열심히 하면 그래도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내 맘대로 일해도 되니까, 조직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농사와 시골살이를 결정한다. 맞기도 하지만 틀렸다. 이런 일이 시골에 왔다고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든 작금의 농사는 자본주의에 자유로울 수 없다, 시골에 산다고 안빈낙도도 불가능하다. 사는 곳도, 사는 방식도, 하는 일도 바꾸기로 한 것, 어떻든 혁명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하니 좀 더 근본적으로 접근하자.
이왕 설국열차와 같은 쳇바퀴에서 뛰어내릴 거라면 종일 해도 지치지 않는, 죽기 직전까지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일, 어쩌면 잠시 하더라도 몰입하고 행복을 느끼는 그런 일을 찾아보자. 그 일로 자본주의에 소소한 저항을 해보자.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를 찾아보자. 그 일을 찾기 위해서 본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 가슴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 소리를 찾고 농촌으로 와야 한다. 그 소소한 저항과 자유, 개개인의 본능을 넉넉하게 받아줄 수 있는 곳은 회색빛의 도시가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시골은 우리의 본능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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